1. 서론

4차 산업혁명이란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 ICT)의 융합으로 이루어낸 혁명시대를 말한다. 18세기 초기 산업혁명 이후 네 번째로 중요한 산업 시대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운송 수단(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 3D 프린팅, 나노기술 등의 6대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4차 산업혁명은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며, 2018년 현재 세계 인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트랙 위에 있다. 1차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고, 2, 3차 산업혁명은 미국을 세계 최강 국가로 변모시켰다. 4차 산업혁명도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구분 지을 것이다. 세계 각국은 4차 산업혁명의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슈밥 의장은 “향후 10년간은 지난 50년간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인, 기업, 국가 모두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약사’란 전문직능인 집단에 속하는 우리들은 다가올 시대를 대비하여 약사 직능, 개국약국, 병원약사, 제약산업, 약사(藥事)제도, 약학교육 등에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는 바 이들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2. 4차 산업혁명은 약사 직능을 위협하는가?

지난 2015년 출간된 『세계미래보고서 2045』(박영숙, 교보문고)를 통해 미래에 사라지는 직업군에 약사가 포함되면서 약사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인공지능 로봇 기술 등장으로 ‘약사’라는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17년 2월, 한국고용정보원도 국내 인공지능·로봇 전문가 21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2025년경 인공지능·로봇의 일자리 대체율이 의사, 한의사, 간호사를 제치고 ‘약사’가 가장 높은 68%가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인공지능 로봇이 처방전을 스캔해 직접 조제할 경우 잘못 조제될 확률이 더욱 낮을 뿐 아니라, 의약품 전문지식도 데이터 저장 및 업데이트를 통해 약사보다 더 광범위한 정보를 보유할 수 있어 더 이상 약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이다.

또한 2017년 8월 한국고용정보원의 미래직업 리포트에 의하면, 불과 13년 뒤인 2030년경에는 전 직업의 29%가 로봇으로 대체 가능하고, 의사가 하는 일의 70%, 약사 및 한약사가 하는 일의 84.2%를 로봇이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약사들이 설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여론에 약사들은 불안감과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약사 직능이 로봇으로 대체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로봇을 움직이는 일은 인간 곧 약사가 담당하여야 하고, 또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는 약사 직능이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약사와 약국은 살아남기 위해, 전문성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변해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이며, 특히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약사(藥事)제도 변화가 우선하여야 한다.

3. 약사(藥事) 제도 변화

우리나라의 약사 제도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 전에 영국의 ‘붉은 깃발법’ 교훈을 잠시 살펴보자. 누구에게나 ‘자동차 왕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혁신적 일관 조립공정으로 대량생산의 길을 연 미국의 헨리 포드(1863~1947)를 떠올리고, 자동차를 미국의 발명품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퀴가 넷 달린 증기 기관차(자동차)는 영국에서 1801년 리처드 트레비식(1771~1833)이 처음 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이 프랑스, 독일, 미국에게 자동차 산업 주도권을 내주게 된 것은 1865년부터 1896년까지 거의 31년간 시행됐던 '붉은 깃발 법'(Red Flag Law) 때문이다.

[영국의 붉은 깃발법(1865년 제정 당시 기수는 자동차로부터 55m에서 앞서 가며 자동차가 오는 것을 알려야 했으나, 1878년 개정되면서 18m만 앞서가면 되었고, 결국 1896년 폐지되었음)]

당시 자동차가 보급되면 마부들이 실직하고 마차 사업자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 예상되자 이들은 자동차 보급에 반기를 들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의회가 '붉은 깃발법'을 제정하였는데, 자동차에는 반드시 3명(운전수, 기관원, 기수)을 태워야 하고, 그 중 기수가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을 달리면서 행인들에게 자동차가 다가옴을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마차의 속도와 비슷하게, 교외에서는 시속 4마일(6.4km/h), 시가지에서는 시속 2마일(3.2km/h)로 제한하였다.

그러던 중 영국의회는 1878년 법을 개정하면서 전방 55m가 아닌 18m 앞에서 알리라고 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면서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뿜지 말라는 조항을 추가했는데 규제를 완화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동차의 보급을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외국의 자동차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였지만, 영국은 뒤처졌고 또 불편한 현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규제를 풀고 새로운 혁신 방식을 받아들였지만 시기를 놓친 뒤였다. 마부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을 염려해 만든 ‘붉은 깃발법’은 결국 1896년 폐지된다. 마부의 일자리도 사라졌고 자동차 산업도 다른 나라를 뒤쫓아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1906년 롤스로이스 자동차 회사가 설립되었지만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을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붉은 깃발법’이 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이 법은 산업의 발전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기득권자의 손을 들어준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책 선택의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는 시점에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

누군가의 이익은 누군가의 손해라는 제로섬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열린 세상, 즉 직능간의 『융합과 연결』을 전제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특히 약사와 환자라는 관계에서 환자 혹은 국민들을 약사법이라는 법의 규제 안에 가두어 희생시키고 있지 않는지 한번 숙고해야 할 때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조만간 울타리는 무너지고 황폐해진 현실만 남게 될 수 있다. 우리 약사직능에 남아 있는 ‘붉은 깃발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① 약사법

현행 약사법(藥事法)은 1953년 12월 18일 법률로 제정되고 1954년 1월 28일 시행된 이래 약품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망라하는 체계로 되어 있기에, 의약품 제조와 유통에 관한 감시 시스템과 약사 직업법과의 체계상의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약사법 규율 내용이 빈약하며, 과학기술 발전과 더불어 약사법 또한 발전하여야 하나, 현실적으로 개정되지 않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밀려오는 지금 시점에서 산업계와 학계, 정부기관과 공공 단체 등 많은 전문가들의 참여를 통해 의약품 유통 및 바이오신약 등 합리적인 규제 과학에 기반을 둔 다양한 약사법 개정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시급히 필요하다.

② 환자안전법

2010년 5월 어느 대학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던 정종현(9세)군이 항암제 투여 중 의료진의 실수로 정맥으로 주사해야 할 빈크리스틴 주사와 척수강내로 주사할 시타라빈이 뒤바뀌어 주사되는 바람에 호흡마비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환자안전법’이 2012년 처음 논의된 후 6년 만인 2016년 7월 29일부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병원 내에서의 대부분의 의료안전사고가 의약품임에도 환자안전위원회의 전담인력 자격기준에 의사와 간호사만 해당되고 약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환자안전법의 핵심은 의료인 및 의료기관의 자발적 보고 체계인데 환자안전법의 입법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지는 의문이다.

③약사와 ‘의료인’ 문제

현행 의료법에 의하면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는 의료인이고, 약사는 의료인으로 분류되지 않으며, 약사를 포함시켜 지칭할 때는 흔히 ‘보건의료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 애초에는 약제사도 의료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나, 1992년 의료법 개정으로 약제사, 간호부(사)를 추가로 ‘의료인’으로 규정하였다. 우리나라도 2008년 당시 경기도약사회 박기배 회장, 2009년 서울대 약대 신완균 교수, 2013년 대한약사회 조찬휘 회장, 약사 출신 김미희 의원(통합진보당) 등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했으나, 당시 의료계와 보건복지부에서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약사가 ‘의료인’으로 분류되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 혹은 불이익은 앞서 언급한 ‘환자안전법’ 외에도 병원약사들의 직능 향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대한의사협회 등에서는 약사의 의료인 편입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지만, 약사가 의료인에 포함되면 질병군에 따라 약제에 관련하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500여명의 전문약사들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에, 제1단계로 전문약사, 제2단계로 병원약사, 제3단계로 개국약사까지를 의료인에 포함시키는 단계적 접근법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판단되며, 향후 약업계 내에서 이 부분에 대한 공론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④약사 대 한약사

1993년 한약분쟁 이후 양방과 마찬가지 형태의 한방 의약분업을 전제로 약사법을 개정하였고, 그에 따라 한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이 모두 설치된 종합대학의 약학대학 내에 한약학과를 설치하였으며, 1996년 경희대와 원광대, 1998년 우석대에 한약학과를 설치하였다. 경희대와 원광대 한약학과 1기생이 2000년 첫 한약사 국가시험을 쳤으며, 각 대학에서 40명씩, 매년 120명 규모로 배출되고 있다.1995년, 1996년도 약학대학 입학자 및 1997년 이전 한약자원학과 등 한약 관련 학과 입학자들에 한해서 한약사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 1997년 이후 한약학과가 아닌 기타 한약 관련 학과에 입학한 사람은 한약(재) 도매 업무만 할 수 있고 한약사 국시 응시자격은 없다. 단 1994년 7월 8일 이전까지 약사 면허 취득자와, 1994학번까지의 약대생 중 졸업 2년 이내에 '한약조제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한약사 면허가 없어도 한약을 조제할 수 있다. 2017년 2월 현재 한약사 수는 2,414명이며 대략 600여 한약국이 개설되어 있다.

1993년 한약파동 당시 한의학 의약분업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자격증이지만, 이후 한의학 의약분업이 무산되면서 기존 취지가 무색해졌고, 일부 한약국은 ‘한약국’이라는 표기도 안하고 영업 중이며, 표기한 한약국도 '행복「한」약국' '편안「한」약국' 등 교묘히 일반 약국인 것처럼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약사는 약국을 운영하고, 한약사는 한약국을 운영하도록 약사법을 개정해야 하고, 또 양약과 한약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국민들께서 해당 전문가로부터 복약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현행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약사와 한약사를 구분한다는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시행되는 제도이다. 2007년부터 약사·한약사 통합에 대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약사는 6년제, 한약사는 4년제 수업 연한을 두기에 더 어려워졌다.

2015년 말부터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의학회 등이 주도하여 2025년 목표로 ‘의료일원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지만, 한의사들의 협조가 미흡하여 그 여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의사나 한의사 중심의 의료 시대였다면 미래는 환자 중심의 의료 시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기에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의료일원화’가 달성 될 가능성이 높다.

약사⁃한약사, 의사⁃한의사 등의 직능 분할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지 않은 ‘붉은 깃발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러한 직능간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일원화’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4. 결론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약업계의 미래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고, 또 소비자 수요에 따른 개인 맞춤형 정밀의료와 각종 데이터의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인구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의·약학 기술 발전, 안전에 대한 국민적 기대수준 향상에 대응할 수 있는 약사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변화에 적합한 약사역할 정립 등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약사(藥事)제도의 개편 또한 시급히 필요하다.
 
 - 부산대 약학대학 김남득 교수 기고 내용을 발췌 -